3. 개독교의 탄생
사이버세계에 대한 우리 기독교계의 대응은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4.0시대라고 부른다. 인공지능, 무인공장, 가상현실 등으로 예상되는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에서 차용하여 4.0을 많이 쓴다. 몇 단어로 정리가 똑 부러지게는 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일자리4.0, 마케팅4.0, 4.0교육 등 4.0이 지향점이 되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교회의 IT 사역에 어둠을 선사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에 인터넷에서도 대유행한 2.0이다. 2.0은 개방, 공유, 참여라는 세 단어로 그 철학을 표현했다. 홈페이지도 세 정신을 구현하는 웹2.0의 추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웹2.0의 철학을 반영한 사이트라 하면 홈페이지의 특정한 내용이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도록 열어 주고(개방) 그 내용을 퍼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공유) 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는(참여) 콘텐츠를 최대한으로 담은 사이트라 할 수 있다. 이 때 중요한 것이 그 철학을 쉽게 혹은 자동적으로 구현되도록 하는 보조적 기술들이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사이트에 새로운 글이 게시되면 공유코드를 적용한 다른 사이트들에 거의 실시간으로 그 글의 일부와 링크가 공유되도록 하는 RSS(Real Simple Syndication or Rich Site Summary) 등과 같은 것들이다. 교회홈페이지는 물론 그 당시 기독교포털로 분류되는 그 어떤 사이트도 그런 기술을 채용한 곳은 없었다.
인터넷에 푹 빠진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사이트들은 대부분 웹2.0 기술이 적용되어 있었다. 고객이 많으니 당연한 조치였다. 지금이나 그 때나 마찬가지겠지만 인터넷에 빠져 사는 사람 중에는 반기독교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계의 좋지 않은 소식은 한 군데에 뜨면 수많은 다른 사이트에 자동으로 공유되고 곧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글은 강력한 전파성이 있다. 예전과 달리 순식간에 온 나라에 펴졌다.
어떤 사안에 관하여 별다른 주관이 없던 사람은 그에 관하여 처음 듣는 내용을 비교적 쉽게 인정하게 되고, 그 인식을 다시 바꾸려면 스무 번 이상의 반대편 이야기를 들어야 겨우 가능하다고 한다. 여론형성의 법칙이다. 기독교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많은 넌크리스천(non-Christian)들은 인터넷에서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반기독교적 콘텐츠를 접하면서 안티크피스천(anti-Christian)으로 쉽게 변해 간 것이다.
교회나 기독교계의 어른들은 사이버세계의 변화를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사이버세계 자체가 생소한데 그 변화를 감지하기가 불가능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문제였던 것은 교계의 사이트들은 그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사이트에서 수익모델을 창출하기는 또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수십억을 들였다고 하는 모 기독교포털은 지속적으로 자본잠식을 계속해서 힘들어했다. 책임자는 사이버세계에 복음은 전할 방법을 강구하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귀한 헌금을 모아서 투자하며 잘 키우라고 하는 목사님의 눈치에 속이 타들어 갔을 테니 말이다. 예수님의 눈짓과 손짓보다 헌금을 한 성도와 목사님의 눈짓이 더 가까운데 어쩔 것인가.
다른 곳에서 다 적용되고 그 부작용을 느끼기까지는 기독교계의 웹2.0은 그래서 한 군데도 없었다. 교계의 좋은 소식은 기껏 기독교포털이나 교회홈페이지만 실리니 그 소식은 결코 저절로 확산이 될 수 없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그 사이트를 알기도 어렵고, 혹 그 곳에 방문을 했더라도 혼자만 보고 나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자동화된 기능이 없었으니 일일이 퍼다 이 곳 저 곳에 나를 수고를 하기도 번거롭고 어려운 데다 저작권 문제도 신경을 써야 했으니 말이다. 자동으로 원 글이 실린 사이트로 유도되어 저작권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웹2.0을 구사하는 교계 밖의 사이트들과는 전혀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실제로 우리나라를 살리고 섬기는 그 많은 헌신은 묻혀버리고 크고 작은 교회의 비리와 모욕적인 소식들만 인터넷 속에 편만하게 된 것이다. 급기야 네티즌 중 누군가가 기독교를 다르게 부르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개독교의 탄생이다.
사이버세계에 대한 우리 기독교계의 대응은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4.0시대라고 부른다. 인공지능, 무인공장, 가상현실 등으로 예상되는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에서 차용하여 4.0을 많이 쓴다. 몇 단어로 정리가 똑 부러지게는 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일자리4.0, 마케팅4.0, 4.0교육 등 4.0이 지향점이 되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교회의 IT 사역에 어둠을 선사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에 인터넷에서도 대유행한 2.0이다. 2.0은 개방, 공유, 참여라는 세 단어로 그 철학을 표현했다. 홈페이지도 세 정신을 구현하는 웹2.0의 추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웹2.0의 철학을 반영한 사이트라 하면 홈페이지의 특정한 내용이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도록 열어 주고(개방) 그 내용을 퍼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공유) 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는(참여) 콘텐츠를 최대한으로 담은 사이트라 할 수 있다. 이 때 중요한 것이 그 철학을 쉽게 혹은 자동적으로 구현되도록 하는 보조적 기술들이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사이트에 새로운 글이 게시되면 공유코드를 적용한 다른 사이트들에 거의 실시간으로 그 글의 일부와 링크가 공유되도록 하는 RSS(Real Simple Syndication or Rich Site Summary) 등과 같은 것들이다. 교회홈페이지는 물론 그 당시 기독교포털로 분류되는 그 어떤 사이트도 그런 기술을 채용한 곳은 없었다.
인터넷에 푹 빠진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사이트들은 대부분 웹2.0 기술이 적용되어 있었다. 고객이 많으니 당연한 조치였다. 지금이나 그 때나 마찬가지겠지만 인터넷에 빠져 사는 사람 중에는 반기독교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계의 좋지 않은 소식은 한 군데에 뜨면 수많은 다른 사이트에 자동으로 공유되고 곧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글은 강력한 전파성이 있다. 예전과 달리 순식간에 온 나라에 펴졌다.
어떤 사안에 관하여 별다른 주관이 없던 사람은 그에 관하여 처음 듣는 내용을 비교적 쉽게 인정하게 되고, 그 인식을 다시 바꾸려면 스무 번 이상의 반대편 이야기를 들어야 겨우 가능하다고 한다. 여론형성의 법칙이다. 기독교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많은 넌크리스천(non-Christian)들은 인터넷에서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반기독교적 콘텐츠를 접하면서 안티크피스천(anti-Christian)으로 쉽게 변해 간 것이다.
교회나 기독교계의 어른들은 사이버세계의 변화를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사이버세계 자체가 생소한데 그 변화를 감지하기가 불가능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문제였던 것은 교계의 사이트들은 그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사이트에서 수익모델을 창출하기는 또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수십억을 들였다고 하는 모 기독교포털은 지속적으로 자본잠식을 계속해서 힘들어했다. 책임자는 사이버세계에 복음은 전할 방법을 강구하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귀한 헌금을 모아서 투자하며 잘 키우라고 하는 목사님의 눈치에 속이 타들어 갔을 테니 말이다. 예수님의 눈짓과 손짓보다 헌금을 한 성도와 목사님의 눈짓이 더 가까운데 어쩔 것인가.
다른 곳에서 다 적용되고 그 부작용을 느끼기까지는 기독교계의 웹2.0은 그래서 한 군데도 없었다. 교계의 좋은 소식은 기껏 기독교포털이나 교회홈페이지만 실리니 그 소식은 결코 저절로 확산이 될 수 없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그 사이트를 알기도 어렵고, 혹 그 곳에 방문을 했더라도 혼자만 보고 나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자동화된 기능이 없었으니 일일이 퍼다 이 곳 저 곳에 나를 수고를 하기도 번거롭고 어려운 데다 저작권 문제도 신경을 써야 했으니 말이다. 자동으로 원 글이 실린 사이트로 유도되어 저작권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웹2.0을 구사하는 교계 밖의 사이트들과는 전혀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실제로 우리나라를 살리고 섬기는 그 많은 헌신은 묻혀버리고 크고 작은 교회의 비리와 모욕적인 소식들만 인터넷 속에 편만하게 된 것이다. 급기야 네티즌 중 누군가가 기독교를 다르게 부르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개독교의 탄생이다.